'관찰일기'에 해당되는 글 8건

  1. 종합 병동 2007/06/16
  2. 풍경 (2) 2007/03/19
  3. 오늘 마주친 두 명의 아이 2006/12/22
  4. 거침없다 2006/06/07
  5. 노인이 된다는 것 2006/05/29
  6. 조기 영어 교육 2006/05/08
  7. 횡단보도에서 버스까지 2003/06/30
  8. 우리는 어쩌면 만약에 2003/05/23

종합 병동

from 분류없음 2007/06/16 00:22
병문안을 다녀왔다.

병원 밖 세계에선
작은 것에도 욕심내고 조금이라도 지곤 못산다며 박터지게 경쟁하고
서로 어깨를 부딪히며 남이야 다치든 말든, 마음 속으로 죽이기도 여러번 ...
그렇게 정신없이 핏대올리며 살다가 병원이란 다른 세상에 가면

그곳엔 휠체어에 몸을 싣고 산책나와 잠이 든 어린 아이가 있다.
힘없는 다리를 한발 한발 끌며 링거를 들고 걸어가는 젊은이가 있다.
긴 병수발에 간이침대 같은 표정이 되어버린 마른 노모가 있다.

엘리베이터 10층을 오르는 동안
아버지를 넘어뜨린 병이며 차가운 의사며 부조리한 체계에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는 빚과 궁색한 집안사정이며 그렇게 살게 만든 아버지까지
모두에게 '짜증나. 전부 짜증나' 라고만 낮게 내뱉는 덥수룩한 머리의 소년도 만난다.

그리고.
이름의 마지막 글자가 X표시된 이름표들이 나란히 붙은 방을 수없이 지나,
원인도 모르며 뇌수술을 받고 실밥을 뗀 수술자국이 선명한 서른세살의 청년이 누워있는 병실로 간다.

수술 받기 전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고모. 나 누구를 해코지 한 적도 없고 크게 잘못한 일도 없고 착하게만 살아왔는데.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막막하게 물어봤다는 그는
아는지 모르는지 선한 눈빛 그대로 한살배기가 되어있다.

수술후 한동안 의식도 없이 중환자실에서 헤메다
일반병실로 옮겨 재활 치료도 받고 많이 좋아진 상태라.
오랜 간호 뒤인데도 그의 어머니는 그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 하나,
웃음 하나, 반사작용일지도 모를 손짓 하나에 하루 하루가 다르다 한다.

어쩐 일로 허허 웃어보이는 그에게
'이제 웃네. 니 그래 되고 고모가 젤 많이 울었재?'
엄마는 눈이 또 빨개진 채 웃어주는 게 마냥 고맙기만 하다.

멀쩡하더니 중국어도 잘하고 일본인 여자친구도 있더니
하루아침에 가족도 몰라보고 말도 몸짓도 잃어버리고
까까머리에 눈만 껌뻑거리는 걸 보고있자니 나는 기만 막힌다.

앙상한 뺨과 팔 다리가 안쓰럽다가 문득 오빠 키가 이렇게 컸었나,
껑충한 키가 오히려 사무친다.

오늘은 새로운 무엇을 하더라 하나씩 좋아지니 그게 재미네.
몇개월은 다 그렇단다. 머리 속 피도 마르고 하면 더 좋아질거다.
젊으니까 재활하고 그러면 빨리 돌아올거다 주고받다가
'너희 엄마가 집에도 못가고 니 이만큼 살려냈데이. 니 알지?'
우리는 다시 그의 얼굴을 쳐다본다.

실밥 뽑았으니 이따 목욕 시켜 볼란다. 딸래미 기다리니 들어가거라
돌려보내는 손길을 잡아 고생하세요. 오빠 안녕.
표정관리 되지 않는 목잠긴 웃음으로 돌아선다.

터벅터벅 돌아오는 길.
병문안 종합세트인 과일 바구니며 음료수박스, 통조림을 거두며
가판대 아줌마도 집에 갈 준비를 한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그냥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따뜻한 당신 손을 잡는 것, 콩닥콩닥 뛰는 내 아이 가슴을 느끼는 것,
말하고 싶은 말을 하고, 가고 싶은 곳으로 자유롭게 걸어가는 것,
사람들이 바라는 기적이 바로 그것이다.

풍경

from 분류없음 2007/03/19 11:10
안과 가는 길.

셔츠앤타이 매장 앞에
퀵서비스 아저씨가 헬멧을 쓴 채 자판기 커피를 홀짝이며 마시고 있다.

도로 옆에 오토바이를 세워두고,
펄이 들어간 비비드한 타이와 셔츠 디스플레이를 보고 있다.

홀짝..

'빨리빨리 퀵서비스'라고 쓰여진 조끼를 입은채

또 홀짝..
Tag // Life, 관찰일기
아침에 출근하느라 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면
그 시간 즈음 엄마와 버스에서 내리는 여자 아이가 있다.
몇 번씩 본 적 있는 그 아이는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 묶고
점퍼에 유치원 가방을 매고 언제나 씩씩하게 내린다.
입을 좀 벌리거나 혀를 내밀고, 약간 돌출된 눈을 가진 아이는 다운증후군이다.
자기가 먼저 내린 후 엄마가 카드를 찍느라 내리는 게 늦으면
'엄마-!!' 하고 야무지게 엄마를 부른다.
어디 이 근처에 통합교육을 하는 곳에 다니고 있나보다.

오늘 아침에도 그 아이와 엄마를 만났다.
나도 딸아이가 커 갈 수록 이렇게 컸으면, 커서 어떻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늘어나는데,
저 아이의 엄마는 어떤 바람으로 아이를 키우고 있을까.  
다른 엄마들이
더 좋은 성적 받고, 훌륭한 학교 가서 좋은 직업 가질 수 있었으면 하고 아이에게 바랄 때,
혼자 밥 먹고, 생필품 사고, 기본적인 생활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가르치면서
내가 죽어도 잘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차이인가.
그 아이가 아주 작은 발전을 보일 때 누구보다도 큰 행복을 느끼고,
그 만큼의 좌절과 고통을 느껴가며 아이를 키우고 있을까..
아이를 키우는 행복과 아이에 대한 사랑이 다를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버스를 기다렸다 .

방금 소득공제 영수증을 받아오는 길에 또 다른 아이와 마주쳤다.
신호를 기다리며 건널목에 서 있는데 한 할머니가 아이의 얼굴을 장갑으로 닦아주고 있었다.
아이가 울었는지 눈가엔 눈물이 맺혀있고, 콧물이 나왔는지 할머니는 검은 천장갑으로
아이의 코를 닦고 얼굴을 닦고 옷을 닦아주었다.
눈과 입이 좀 나온 그 아이도 한눈에 다운증후군이란 걸 알 수 있는 외모였지만,
더 어리고, 그 나이때의 아이들과 다름없는 천진하고 뽀얀 너무 예쁜 얼굴의 남자아이었다.
휴지나 손수건이 없는지 할머니는 얼굴을 닦아주다 장갑을 뒤집어서 쓰시는데
아이의 얼굴에 장갑에서 묻어나는 검은 얼룩이 보였다.

내 주머니에도 카드키와 지갑 뿐이어서
좀 떨어진 떡볶이 포장마차에 들어가서 두루마리 휴지를 좀 쓰겠다며 몇장 뜯어왔다.
애지중지 손자를 보듬어주고 있는 할머니에게
"이거, 애기 휴지 쓰세요" 하고 건넸더니
할머니는 뜻밖이지만 매우 반기는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한다.

신호가 바뀌어 돌아서 길을 건너는데
괜히 울컥 목이 아파온다.

거침없다

from 분류없음 2006/06/07 23:58
이제 제 뜻 대로 가고 싶은데 가고 만지고 싶은 거 만지는
서진이를 보고 있자면 거침없다는 단어가 생각 난다.

하고 싶은 걸 못하게 하면 고집도 부리고
뜻대로 안되면 드러누어 떼쓰지만

모든 것에 다가가기를 거침없이 한다.

백화점 벤치에 인상쓰고 도도하게 앉아있는 중년부인도
코앞에 거침없이 다가가 호기심 가득찬 눈으로 올려봐 실소하게 만들고

다들 우아하게 식사하는 조용한 레스토랑에서도
면발을 두손으로 잡고 이로 끊어먹는 원초적 본능을 보여준다

호감가는 어린아이가 나타나면 멀리서부터 두팔을 벌리고
미소를 머금고 다가가 살살 어루만지며 친하자 하는

세상에 대한 사랑이 거침없는 이 아이.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주저하고 계산하는.. 그런 사람으로 변하지 않았으면.
그렇지 않기 위해서 부모는 어떻게 해줘야 할지.
고집을 꺽지않고 아이가 원하는 걸 이해해주고, 제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것 부터가 시작일 수도 있는데 막상 떼를 쓸 때는 정신이 멍해진단 말이지.. -.-

                             < 돌격하는 서진. 양말만 신은 채 한강변을 활보하다 >

노인이 된다는 것

from 분류없음 2006/05/29 21:33
내 기억에 아빠는 언제나 건강한 청년인 것만 같았다.
퇴근 후 한쪽 팔로 나를 들어올리던 그 시절이 한참 지난 얼마 전까지도.
먹는 것은 잘 챙겨먹지 않더라도 늘 조깅을 하고 운동을 좋아하셔서
다른 아버지들 보다도 건강한 사람이라고 의례..

언젠가 산책을 갔다가, 남산 타워에서 남산 입구까지
서진이와 아빠와 셋이 내려오는데
잠든 서진이를 아빠와 내가 번갈아 안았는데..
내색을 하진 않았지만 아빠는 생각보다 참 쉽게 힘들어 했다.

내 기억의 아빠라면 입구까지 계속 안고 갈 수 있었는데
한참을 가다가 결국 뒤따라가던 내게로 돌아서서 '자..'  하구 딸애를 넘겨준 아빠의 표정,
아빠도 이제 노인의 근력이구나..

그리고,
백화점 앞에서 만나기로 한 엄마가 30분이나 지나도록 안와서
난 팔짱을 끼고 화가 난채, 헐레벌떡 지하보도에서 올라올 모습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보이는 엄마 얼굴이 아주 아주 천천히 힘들게 숨을 쉬면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오는 거..
늦어서 화가 났던 마음이 바로 엄마가 늙어 노인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화로 바뀌어
못본척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버스 앞 자리에 앉은 할아버지의 검버섯 핀 얼굴과
앙상한 어깨를 바라보면서.. 언젠가 내 남편이 저런 노인이 된다면
나는 어떤 모습이고, 남편을 어떤 마음으로 하루 하루 보며 지내게 될까
잠시 생각..
Tag // Life, 관찰일기

조기 영어 교육

from 분류없음 2006/05/08 10:39

청담동 쪽으로 차를 타고 가는 길에, 학동사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횡단보도 건너편에 한 외국인 커플이 건너오는 여자에게 길을 물어보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는 길을 모르는지 영어를 못하는지 손을 흔들며 가버렸고
외국인 커플은 쩝 -.- 하는 표정으로 다시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그때 초등학생이거나 더 어려보이는 한 여자아이와 같이 길을 건넌 할머니가
아이의 손을 이끌고 머리를 모으고 지도를 보고 있는 그 커플에게로 다가간다.

'할머니가 자상하셔서 영어를 몰라도 어떻게든 마음을 써주시려는 걸까?'

할머니는 아이의 등을 두드렸고
아이가 커플에게 말을 건너자 커플은 반신반의 질문을 하고
아이는 할머니에게 한국말로 커플의 질문을 말하고
할머니는 아이에게 한국말로 대답을 하고
아이는 커플에게 할머니의 대답을 영어로 말해줬다.

남자 외국인이 아이처럼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리고 여자 외국인은 질문을 하나 더했고
아이는 할머니에게 다시 질문하고
할머니가 손으로 방향을 표시하며 대답하고
아이가 다시 커플에게 영어로 말하자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보며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이제 됐다 ^-^ 는 표정으로 아이에게 대만족을 표시

할머니와 아이는 바이바이 하고 가고 우리도 좌회전을 하면서
외국인 커플의 안도+행복한 표정으로 아이를 칭찬하는 몸짓을 봤다.

'어쩐지 할머니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 접근한 거였구나.. '

Tag // 관찰일기

어떤 사람은 항상 다니는 공간 안에서도 매일 다른 골목길을 찾아 다니며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재미를 즐긴답니다.
그런데 저는 같은 길을 다니며 그 길의 날마다 조금씩 다른 표정을 관찰하길 좋아하는 편이지요.
그런 관찰이 누적되면 짧은 골목길을 지나는 동안에도 계절마다 변하는 풍경들을 담을 수 있고, 어느 가게에 앉아있는 아줌마가 그 집 주인과 어떤 관계인지 또 성격은 어떤 사람인지도 알게되지요.

정류장 가는 길에는 횡단보도가 하나 있고, 그 횡단 보도 맞은 편에는 오래된 부티끄, 만두집, 약국.. 그리고 2층에 죽 전문점 등이 있습니다.

(그 만두집은 젊은 아저씨와 부인, 그리고 부모님이 같이 운영하는 듯한 손만두집인데 큼지막한 만두에 당면과 각종 야채, 고기가 빵빵하게 들어가 있어 왕만두 6개에 4500원이라는 만만치 않은 가격을 받음에도 깔끔하고 좁은 가게의 문 밖에는 항상 기다리는 손님들이 넘쳐납니다. 횡단보도가 옆 블럭에서 그 만두집 앞으로 옮겨지면서 더더욱 장사가 잘 되고 있지요. )
토요일 오후, 그 횡단보도에서 녹색 신호가 켜지길 기다리는 동안의 풍경은 컷 컷 컷.. 일상을 담은 영화의 잔잔한 오프닝 씬 같이 느껴지더군요.

만두집 할머니가 만두를 찌는 솥을 살펴본 후 뚜껑을 닫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고,
그 가게 앞에는 2층 식당에 배달 온 야채 트럭이 잠시 주차를 해놓고 있습니다.
트럭 앞에는 버스를 기다리는 주황색 티셔츠를 입은 한 미소년이 고개를 들어 눈에 안약을 넣고 있습니다. 참한 손짓으로 안약을 넣고 있는 선이 가는 옆 얼굴은 여린 몸매와 어울려 굉장히 여성적으로 보였습니다.

한 여자가 그 소년 앞을 지나 오래된 부티끄 가게 앞을 걸어갑니다. 토요일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듯한 발걸음이 무거워 보입니다.
밝은 톤의 치마와 5센치 가량의 뮬을 신은 다리로 또각또각 걸어가는 그녀는 오늘 오후에 아무 약속도 없어서 조금 우울해져 있는 게 아닐까..

신호가 녹색으로 바껴 걸어나갈 때 문득 뒤를 돌아보니 퇴근길에 항상 나와있던 뻥튀기 아저씨의 트럭은 보이지 않더군요. 하나에 2천원씩이지만 3개 사면 5천원에도 준답니다. 집앞 뻥튀기 차에서 엄마가 성공했다는 그 방법이 퇴근길 그 뻥튀기 아저씨한테도 먹혔을 때, 뻥튀기계에 암묵적인 승인이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했었습니다.

길을 건너 버스를 타기 위해 트럭 앞 그 소년 옆에 저도 섰습니다.
앗 우연히 보게 된 그 소년의 앞모습은 뜻밖에 넙대대합니다. 실망... 이제 미소년은 넙딕이로 강등...
넙딕이 뒤의 트럭에서 야채 아저씨가 박스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챙 넓은 모자를 쓰고 검게 그을린 40대 중반의 아저씨는 무척이나 흥겹게 일을 하고 있습니다. 콧노래를 부르며 박스를 한손으로 번쩍 들고 배달을 가는 모습이 씩씩합니다.
아저씨가 2층으로 올라가자 저편에서 젊고 날씬한 여자가 양손에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넙딕이와 제 쪽으로 걸어옵니다.

엄마라고 생각하기엔 젊고 세련된 모습인데, 나이는 관리를 잘한 30대 초반 정도인 거 같군요.
유치원생 정도의 여자 아이가 누나, 2살 정도 아래인 듯한 남자아이가 동생인거 같습니다. 여자아이는 프티챌같은 과일푸딩을 한손에 들고 먹지 않고 입으로 껍질을 잘근잘근 씹으며 걷고 있습니다.

제 앞을 지날 때 여자아이가 건너편을 보고, "황지연~!" 하고 몸집에 안어울리는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를 칩니다. 그리곤 곧 30대초반 여자를 올려보며 "엄마, 지연이!"라고 가리킵니다. 엄마가 맞았군.
건너편을 보니 머리를 귀엽게 묶은 통통한 여자아이가 이쪽을 보고 있습니다. 길을 지나던 참인데 친구에게 발견되었군요.
엄마와 아들 딸은 길을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섰습니다. 여자애는 자꾸 친구를 보며 "황지연! 너 거기 있어~"라고 소리치고, 건너편의 친구는 "뭐? 여기 있으라구?" 라고 말하며, 친구를 바라본 채로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장난을 부립니다.
여자애가 다시 "황지연! 너 거기 있어. 가방에 까미있어!"라고 합니다. 그러자 엄마 손을 붙잡고 있는 남자아이도 "까미 있어~"라고 거듭니다. 동생도 누나의 친구를 아는 모양이죠.

마침 버스가 와서, 넙딕이와 함께 올라탔습니다. 저는 운전석 바로 뒷 자리에 앉았는데 출발한 버스는 한바퀴도 구르기 전에 보행신호에 걸려 다시 섰습니다.
앞 유리창으로 차 앞을 지나 길을 건너는 엄마와 아들딸이 보입니다.
까미라는 게 뭘까? 애완동물인가? 가방에 있다는데 어느 가방. 여자애는 책가방을 메고 신발 주머니 같은 걸 하나 팔에 걸고 있습니다.

건너편 길을 보니 황지연은 사라지고 없네요.
거기 있으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도 뒷걸음질 장난에 심취해 가버렸나 봅니다.
길을 건넌 엄마와 남동생은 손을 잡은 채 계속 가던 길을 가는데, 여자애는 엄마의 손을 놓고 친구가 어디로 가버렸는지 좌 우를 살핍니다.
그 여자애의 신발 주머니 아래 부분이 둥글게 불룩하네요. 아마 거기에 까미가 들어있나 봅니다.
강아지인지 아니면 토끼인지... 아무튼 까만 놈이니까 까미라고 부르겠지요?

신호가 바껴 차가 출발할 때, 건너편에서 조금 실망한 모습으로 걸어가는 여자애가 보입니다. 지연이에게 까미를 진짜 보여주고 싶었는데 상심했나 봅니다...

Comments (2)

아니 어떻게 이렇게... 마음의 눈으로 보이면 이렇게 되나요?

lunatree:

이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별 내용없이 길게 쓴 글 읽는 게 아주 고역이라고 하던데. ㅋㅋ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는 누구나 관심을 갖게 되잖아요. 그걸 보는 게 좋아서 눈여겨 관찰하죠.

정말 오랜 만에 일찍, 7시 반쯤 퇴근을 했다.
저물녘이지만 이 정도면 밝고 좋아.. 거리를 지나 버스를 탔다.

뒤에서 두번째 자리에 앉아서 가는데 뒷 자리에 앉은 남자 둘이서 하는 얘기가 들렸다.
언뜻 'tommorow..' 어쩌구 하는 짧은 영어가 들렸는데, 한 남자는 미국 생활을 오래 했거나 교포인 듯 한 발음. 다른 남자는 평범한 한국 사람인 것 같았다.
둘은 영화를 찍는 일을 하나 보다.
내일 촬영은 어쩌고, 오늘은 캠을 드느라 어깨가 아팠다. 오프닝이랑 엔딩을 무지하게 길게 만들자. 100부터 카운팅하면 어때, 좋은 생각이지?.. 하는 얘기를 주고 받았다.

미국발음이 섞인 남자가 '근데 너 영화는 어떤 거야? 첫 장면 부터 끝에까지 얘기해봐'하자 한국토종발음이 얘기했다.

"엘리베이터 앞으로 어떤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가. 버튼을 막 눌러. 인터뷰가 있는데 늦은 거야. 그래서 막 정장 입었는데 넥타이 매면서 엘리베이터 기다려. 문이 열려서 탔는데 안에 여자가 있는거야.
근데 왜 같은 동네에 한 아파트 사는 사람이라도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어색하잖아. 뻘쭘하잖아. 원래 엘리베이터에서는 다들 그렇잖아.
그래서 내려가는 동안 서로 서서 있는데, 남자 시점에서 여자를 좀 흘끔흘끔 보는거야. 약간 관심은 가는데 뭐 그냥 내려가.

문이 열리면 이 남자는 다른 데로 막 가는데, 어떤 빌딩 화장실로 들어가. 오줌 싸러. 그런데 또 다른 남자가 하나 있었던 거야. 그래서 나란히 옆에 서는데 왜 그렇잖아. 오줌 싸러 서 있어도 다른 사람이랑 옆에 있으면 어색하잖아.
그리고 먼저 있던 남자가 오줌 다 싸고 나가면 이제 이 남자를 카메라가 따라가는 거야.

이 남자가 걸어서 지하철 타러 계단을 내려가. 이 남자가 내려가고 한 여자가 올라오는데 남자랑 둘이 부딪혀. 그래서 뭐가 떨어져. 지갑 같은거.. 그래서 딱 여자가 주우면 그때 부터는 이 여자의 시점이 되는건데, 이 여자가 아까 첫번째 남자가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여자인거야.

그러니까 처음에는 여자 얼굴을 보여주면 안되지. 그리고 지갑을 주운 후부터는 뒤로 가는 거야. 여자가 남자랑 부딪히기 전에 지하철을 타고, 거리를 걷고, 뭐 다른 가게에도 들렀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고, 엘리베이터에 한 남자가 타고 그렇게 뒤로 가는 거지.
그리고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여자도 남자한테 마음이 있어서 남자를 살짝 보는 걸로.. "

얘기를 다 들은 미국식 발음이 묻는다. 꼭 지오디의 박준형처럼..
"야 그러면 여자는 어떻게 뒤로 가게 할 거야?"
"어? 그냥 찍어서 필름을 리와인드 해야지."
"연기를 뒤로 가게 하는 건 아니고?"
"그것도 생각해 봤는데, 찍기 어려울 거 같아서"
"너 뒤로 걸어봤어? 그거 되게 이상하잖아. 못할 걸 아마."
"응. 그니까 정상으로 찍은 다음에 뒤로 돌려야지"

커피빈 앞 정류장에 왔을 때 남자 둘은 내렸다.
남자들이 내린 후에 생각이 났다.

예전에 그런 말 한 영화 감독인가.. TV에서인지 잡지 인터뷰에서 얘기한 건지.. 기억은 잘 안나는데,
자기가 고등학교 때 쯤 대한극장에서 어떤 영화를 보는데, 우연히 2층에서 음료수 캔이 떨어지는 걸 봤다고.

그런데 오랜 시간이 흘러 같은 쪽 일을 하는 사람을 만나 얘기를 하다보니, 그 때 그 음료수 캔이 떨어지는 걸 그 사람도 봤더라고. 음료수 캔이 2층에서 1층으로 낙하하는 순간 둘은 같은 공간에 있었던 것이다.

음..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이 장만옥에게 몇날 몇일 자기와 함께 한 1분을 기억시키는 것과는 반대라고 볼 수 있겠지.

나중에 그 한국식발음이 영화를 만들게 되서 내가 그 영화를 보거나,
아니면 그 영화를 만들지 못하더라도.. 언젠가 그런 단편 영화를 만들어 보려고 버스에서 친구에게 말을 한 적이 있었고, 그 얘기를 하는 순간 앞 자리에서 듣고 있던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을 상기시킬 수 있는 날이 올까?

우리는 어쩌면 만약에.. 그 노래 제목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