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쪽으로 난 내방 창문, 일요일 아침이면 자다자다 눈이 부셔서 일어나야만 합니다. 그러나 피곤한 평일에는 쏟아지는 햇살도 의식 못한 채 그대로 죽은 듯이 누워있게 마련이지요. 옆집 애들이 학교 가는 소리에 일어나면 운이 좋은 것입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옆집 두 녀석은 아주 작은 몸집에 등이 굽은 할머니 손에 자라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거창하게도 외치고 나가는데, 그 시간에 맞춰서 나도 일어나게 되면 그럭저럭 늦지 않게 출근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엔 어디선가 자꾸만 병아리가 울어댑니다. 비오는 날 병아리가 우는 통에 아침에 마음이 심란해져서 일어났던 적도 있습니다. 누구네 것인지..아침마다 애처롭게 삐약 거립니다. 오늘 이미 늦은 시각에 집을 나선 내가 바닥의 신문을 들어 현관 안에 던져 넣는데 앞 집 문이 스르륵 닫혔습니다. 애들 학교 간지 오래 되었을 텐데, 여태 할머니가 애들 가는 길을 눈길로 뒤쫓았던 것인가 했지요. 옆집 작은 방 앞 복도를 지날 때 삐약삐약 소리가 나길래 아, 이방에 병아리가 있는가 보다 하고 지나쳐 엘리베이터를 기다렸습니다.
문이 열리자 안에는 아저씨 한 분과 여자분 한 분이 먼저 타 있더군요. 문이 닫히고 의례 엘리베이터를 타면 그렇듯 정지 자세를 지키며 층 수를 가늠하려고 하는데
“삐약삐약”
소리가 났습니다.
뒤에 있던 아저씨가
"어, 병아리"
합니다.
내 옆의 바닥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조그만 병아리 한 마리가 가만히 서있더군요. 어, 이 녀석... 무지 놀란 내가 손을 뻗어 병아리를 들었습니다.
가늘고 딱딱한 다리, 부드러운 몸통.. 한 손 위에 올려진 너무 작은 병아리. 소리를 내지 않았으면 보이지도 않았을 이 놈, 복도를 걸어오는 내내 나를 따라왔나 봅니다. 발치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병아리를 경비실 아저씨에게 넘기며 누구네 건지 모르겠는데 엘리베이터에 따라 탔더라고 말했습니다. 아저씨는 웃으며 병아리를 받고,
"이거 710호네 건가 보다. 그 할머니, 저 번에는 햄스터를 복도에 놓아 버리더니.."
하더군요.
늦은 귀가 길에 나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황급히 안으로 총총 들어가는 병아리를 다시 보았습니다. 나는 열림 버튼을 눌러 막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따라 탔죠. 병아리는 잠시 시간을 지체한 것이 무척 짜증난다는 표정이었습니다. 나는 우리집 층 번호를 눌렀습니다. 병아리는 버튼을 누르지 않을 작정인가 봅니다. 뜻밖에도 3층에서 문이 스르륵 열렸습니다. 3층에서 내려서 다시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병아리의 뒷모습을 망설이며 바라보다가 저도 뒤따라 내렸습니다. 돌로 쌓인 벽에서 한기가 흐르고 어디에선가 물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고, 오랜 세월 어둠 속을 지켜온 이끼의 냄새가 공기 중에 떠다니고 있는 음침한 계단이었습니다.
병아리는 반은 날개로 반은 다리로 푸드득거리며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이 도시 밑에 대체 무엇이 있길래 이리도 깊게 내려갈 수 있는 것일까요? 도시 아래에 우리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고차원의 세상을 꾸미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순간, 계단이 어느 문 앞에서 사라졌습니다. 무쇠로 만들어진 듯한 아주 장중한 문이었습니다. 이런 문이 주는 두려움이란.. 인간은 낯선 곳의 크고 육중한 문 앞에서 쫄기 마련이지요.
이 문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내가 그곳에 들어갈 자격은 되는 걸까. 들어갈 수 없다면 어떡하지. 돌아가는 길도 모르는데, 혹시 저 문을 넘어가면 저승이 펼쳐지는 게 아닐까. 아니면 영생으로 가는 입구일까. 이런, 내가 생전에 착하게 살았던가. 뭐 찔리는 게 많은데 혹시 다 알고 있을까…
병아리는 문 앞에서 날개 짓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힘차게 해서 한 30센티 오르고, 다시 더 죽을 듯이 날개 짓을 하더니 50센티 오르고... 오르고 내리고 하는 놈을 보면서 나는 저것이 이 정체 모를 문의 통과의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동작 하나하나를 자세히 보고 있었죠.
병아리는 이제 1미터를 뛰어오르더니 문 옆에 튀어나온 구슬을 부리로 눌렀습니다. 딩~ 동~~ . 엄청나게 큰 초인종 소리가 났습니다. 마치 커다란 종 안에서 울리는 소리처럼 문이 있는 원통형의 공간을 흔들어 댑니다. 울림이 멈췄을 때 육중한 문의 밑부분에서 종이 컵 만한 초미니 문이 삐걱 열렸습니다.
앗, 또 병아리다. 문에서 나온 병아리가 문 앞에 서있는 병아리를 알아보고 반가워 합니다.
“아,어서 와!”
“정말 오랜만이지?”
“여기 비 피해는 없었나?”
“말도 마, 양수기 임대했어”
지들끼리 반가워서 시끄럽게 수다를 떨며 좋아합니다. 참 별꼴입니다. 두 놈이 서로 어깨에 날개를 올리고 초미니 문 안으로 총총 들어가더니, 콩- 하고 문을 닫습니다.
놈들 떠드는 소리가 문 안쪽 저편으로 멀어져 가더니 다시 정적과 어둠 속에 혼자 서 있게 됐습니다.
어쩌지? 조용-.
어떡하지?… 아까 그 병아리처럼 뛰어 올랐다 내렸다 해야 하나?
아니지, 그건 초인종 누르려고 그랬던 거지. 초인종 어디있지? 바닥에서 1 미터 위 구슬...
여기 있다. 어쩌지? 눌러볼까? 뭐가 나올까? 이거 누르면 무지 시끄럽던데.
그 엄청난 진동을 혼자 감당해야 하나.
나는 구슬 위에 검지 손가락을 길게 뻗은 채 식은 땀을 흘리며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벌컥-. 또 초미니 문이 열리면서 병아리가 나왔습니다.
"근데, 아저씨 누구세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봅니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저.. 아까 그 병아리분 옆집 사는 사람..."
우물거립니다. 병아리는
"아, 이웃양반이시구만. 들어오세요"
하며 또 초미니 문 속으로 들어갑니다. 가버렸습니다. 초미니 문만 열어둔 채. 내가 병아리보다 얼마나 더 큰데 저기로 들어오란 말이야. 나는 바닥에 엎드려 초미니 문 안쪽을 보려고 눈을 가까이 대봅니다. 잘 안보이지만 안은 레몬 색 입니다. 밝고 따뜻한 빛이군요. 레몬 빛 산이 저 멀리 있는 건가? 둥근 능선이 있고 그 능선은 하얀 하늘과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산이 겹쳐 있군요! 하늘과 닿아있는 레몬 빛 산 아래로 또 좀 더 큰 산이 자리잡고, 그 앞에는 뾰족한 작은 산이 또 있습니다. 근데 가장 하늘에 가까운 산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산이 왼쪽으로 조금씩 움직이는 것 같아요.
앗, 오른편에 까만 점이 나타났습니다. 점은 더 또렷이 커지며 왼편으로 돌더니 정지했습니다.
까맣고 동그란 점이 하늘과 가장 가까운 산에 또렷이 박혀있는 게 아주 잘 보입니다.
깜빡--.
“아저씨, 안 들어오고 뭐해요?”
초미니 문 앞에서 내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던 병아리가 뒤를 돌아보며 내게 한 말입니다.
“내가 너무 커서”
“다 들어올 필요 없잖아요. 눈알만 들어오시죠.”
“뭐?”
“눈알만 있으면 구경할 수 있다구요. 미련한 몸은 문 밖에 두고, 눈알만 들어오시죠.”
“말도 안돼. 눈알만 어떻게 빼. 죽을 텐데.”
“그럼, 관두시고.”
병아리는 앞서서 걸어갑니다. 나는
“잠깐만, 이봐!”
하며 문에 머리를 더 들이밀며 병아리를 붙잡아 보려 하지만 문이 너무 작아 머리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병아리가 멀어져 보이지 않자 나는 눈을 더욱 크게 뜨며 보려고 애를 씁니다.
“기다리라구!”
문에 머리가 으깨져라 가까이 대며 눈을 부릅뜨던 나는 어느새 문 안으로 들어와 있었습니다.
‘어떻게 된 거지?’
돌아보니 문 안 세상이 모두 잘 보이고 그 안에서 난 자유로웠습니다.
문 쪽을 돌아보니 열려진 초미니 문 밖으로 내 모습이 보입니다.
문이 부서져라 들이밀던 얼굴 그대로. 이런, 눈이 있어야 할 자리만 깊은 어둠이 채워져 있습니다.
문 틈으로 이리저리 보니 나의 몸은 초미니 문 안으로 들어가려 엎드린 자세 그대로 입니다.
병아리 말대로 내가 눈알만 들어 왔군요. 나는 이제 눈알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른쪽 나의 눈알이 현재의 나 자신 자체입니다.
전부란 말이지요. 젠장, 다행히 왼쪽보다 시력이 좋은 오른쪽이라는 게 조금 마음이 놓입니다.
이렇게 눈알인 채로 공기 중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니. 참 가뿐힙니다.
이 곳은 정말 조용하군요. 바람은 내가 뜰 정도로 알맞게 불고 상쾌합니다.
무엇보다 나는 눈알일 뿐이니, 행여 이곳에서 아는 이와 마주친다고 해도 나를 알아보진 못하겠죠.
그럼, ‘한심한 놈. 너도 나처럼 병아리 따라 왔겠구만’ 하는 식으로 서로에 대해 씁쓸함을 갖지 않아도 되고 말이죠.
나는 가벼운 마음이 되어 마음껏 높이 날았습니다. 멀리 바닷가가 보이는 군요.
지금은 아마 썰물 때인가 봅니다. 바닷물이 군데군데 고인 채 모래 바닥이 드러나 있군요.
물이 빠진 바닷가, 저 쪽 모래 바닥 위에 버려진 냉장고가 하나 서 있습니다. 주위를 둘러봤습니다.
주위는 넓고 황량한 모래밭이고 물 웅덩이가 사이사이 보일 뿐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얀 냉장고만 모래 위에 비스듬히 박힌 채 서 있습니다.
나는 냉장고 가까이로 가서 여기저기를 자세히 살펴봅니다. 누군가 오랫동안 썼던 손 때가 묻어 있군요.
애지중지 쓴다 해도 흰 냉장고는 세월에 부식되어 더 쓸 수 없게 되었던 모양입니다.
어릴 때 우리집에서 계란찜을 해 먹던 법랑 그릇이 생각나는군요. 엄마는 계란찜을 할 때면 꼭 그 그릇을 썼습니다.
그냥 둥그렇게 생긴 적당한 크기에 바닥 부분에 작은 꽃이 그려져 있는 평범한 그릇이었지만 나는 왠지 그 그릇이 좋았습니다.
엄마가 만들어준 계란찜은 입에서 따뜻하게 퍼졌고 밥이 줄수록 계란찜도 다 먹어가고 드디어 바닥의 꽃무늬와 만나게 되었지요.
그 그릇 생각을 하면 행복해 지는데 언제부터인가 식탁에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말 오래 전에 썼던 그릇이었지요.
어디로 갔을까 그 꽃무늬 그릇은..
그릇 생각에 빠져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저편 모래 땅에 커다란 검은 투견이 나를 보고 침을 흘리고 있습니다.
놈은 모래땅에 박힌 말뚝에 매여있었지만 놈이 이를 드러내며 나를 잡아먹으려고 몸부림을 칠 때 마다 말뚝이 조금씩 빠지는 것 같습니다.
평생 이렇게 무서운 개는 처음입니다. 도베르만이군요.
딱 저 놈의 15분의 1만한 미니핀을 키운 적이 있었는데, 모양은 빼어 닮았지만 영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놈이 다시 한 번 나를 향해 도약합니다. 이번에는 정말 녀석의 힘에 말뚝이 빠져버릴 것만 같습니다.
그 때 저편 모래 언덕에서 낡은 시골 버스 한대가 달려옵니다.
“야! 이쪽이야, 이쪽”
“어서 도망쳐!”
“지금 아니면 영영 붙잡히고 만다구”
내 동지들인가 봅니다.
나는 개를 피해 죽을 힘을 다해 버스로 갑니다. 버스 창문으로 아슬아슬하게 뛰어들어
“고맙습니다. 눈알 여러분”
하고 인사를 했지만 모두들 굳은 표정들이었습니다.
“할망구가 낮잠에 빠져있는 동안 목숨을 각오하고 탈출한 거야”
“할망구라니, 누구죠?”
“저 개 주인”
“지독하게 잔인한 사람이지”
버스는 미친 듯이 달리고 뒤 창문을 보니 드디어 말뚝을 뺀 개가 무거운 말뚝을 매단 채 엄청난 속도로 쫓아 오고 있었습니다.
이러다 잡히겠습니다. 버스는 금방이라도 부서지거나 터져버릴 것만 같은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엑셀을 힘껏 밟는 소리가 났지만 모래 땅을 헐떡이며 달리던 버스가 드디어 쿨~럭 하는 기침을 한번 뱉더니 뻗어버렸습니다.
손에 땀을 쥐고 결의에 찬 표정으로 탈출을 기도하던 무리들에게서 금새 허탈한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습니다.
“이번에도 실패야”
버스 앞 문이 열어 젖혀지고 검은 망또를 두른 노파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자, 그만하면 됐다. 감히 도망을 쳐? 얌전히들 나오라구”
동지들은 차례차례 일어나 앞 문으로 나갔습니다. 하나씩 문으로 나간 동지들은 그대로 노파가 들고 있는 유리병 안에 담겨졌습니다.
노파 옆에는 아까 그 검은 투견이 으르렁 거리며 지켜보고 있었죠.
문을 나오던 한 동지를 본 투견이 달려들어 날카로운 이빨로 동지를 물었습니다.
노파가 곧바로
“뭐 하는 짓이야, 니 놈보다 비싼 거라구”
소리치며 개를 뜯어 말리더니
“망할 것, 도움이 안돼”
하며 엄청나게 커다란 가위을 들어 개의 몸을 싹둑 잘랐습니다.
두 동강이 난 개의 몸 앞부분이 노파의 손에 들린 채 바닥에 핏물을 쏟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 끔찍한 광경을 보고 몸을 떨었습니다.
우리를 모두 넣은 후 뚜껑을 꼭 닫더니 노파는 유리병을 찬장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선반 위에는 우리 말고도 다양한 눈알이 담긴 유리병이 종류별로 놓여있었습니다.
모기 눈알, 뱀 눈알, 도깨비 눈알, 고양이 눈알, 원숭이 눈알, 용 눈알..
병에는 눈알의 종류가 모두 깔끔하게 써 붙여져 있었습니다.
식탁 밑 바닥에 검은 투견의 뒷부분이 앉아있고, 식탁 위에는 개의 앞부분이 놓여져 노파 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의자에 앉아 잠시 쉬던 노파가 일어나 빵 봉지를 들고 선반에서 유리병을 하나 꺼내 다시 앉았습니다.
노파는 빵 위에 눈알을 듬뿍 발라 맛있게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병 속의 눈알들이 일제히 “우~~” 소리를 내며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노파는 들은 척도 안하고 마지막 빵 조각을 입에 넣은 후 물을 마시고 이쑤시개로 이 사이에 낀 눈알들을 빼며 쩝쩝 소리를 냈습니다.
노파는 식탁에서 일어나 부엌을 나갔습니다.
“또 갇혔군”
유리병 안에는 슬픔이 가득했습니다.
“힘을 내자고, 한 번 빠져나가봤으니 좋은 경험 한거라구”
“이 방법은 너무 무리인 것 같아”
“노파가 전혀 생각할 수 없는 방법을 짜내 보자구”
“전혀 다른 차원의 발상이 필요해”
“아주 엉뚱할수록, 먹어줄지 모른다구”
“어이, 신참. 무슨 좋은 방법 없나?”
모두들 나를 쳐다봤습니다.
“저는.. 글쎄, 너무 어리둥절해서 뭐가 뭔지..”
나는 은근 슬쩍 넘어가보려 했지만 전혀 통할 것 같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하기야 목숨이 걸린 문제니까 이해가 갑니다.
내가 무슨 좋은 방법을 얘기할 때 까지 이들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을 작정인 것 같습니다.
“아.. 그러니까 말이죠. 좋은 생각이 나는데..”
나는 일단 얘기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로부터, 음, 몸이 천냥이면 눈이 구백냥이라고 했으니까..”
“그런가? 간이 구백냥 인거 아냐?”
“잠자코 좀 들어봐, 자 계속하게”
“네, 그러니까 제 말은.. 눈은 마음의 창이다..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호.. 그러니까 눈이 마음의 창이니까 우리 마음이 간절히 바라는 바의 통로가 눈이 될 수 있다는 얘길 하고 싶은 거로구만?”
“.. 글쎄. 뭐 그렇죠.”
“오, 그래. 우리 마음은 탈출을 갈구하고있고, 우리 자신이 바로 눈이니까.. 식은 죽 먹기구만”
“좋아. 이건 어때요.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모두들 노는 저을 줄 알죠?”
“물론이지. 자, 그럼 모두들 서로 눈을 쳐다보면서 각자 주문을 외게나. 반드시 간절한 마음으로 혼신을 다해야 하네!”
모두들 다시 결의에 찬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여전히 어리둥절하여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었죠.
유리병 안은 금새 주문소리로 가득해 마치 모기가 들끓는 듯 했으며, 각자 주문도 다양했습니다.
내 오른쪽 눈알은 바로 그 앞의 눈알과 서로 눈알에 핏발이 서도록 노려보며 “분신사바 분신사바”하며 주문을 외었고,
왼쪽에서는 백내장의 기미가 보이는 늙은 눈알이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었으며
저 뒤쪽 어딘가에서는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유리병은 간절한 기도의 기운으로 뜨겁게 달궈지고 있었으며, 기도가 절정에 이르자 유리병이 진동을 시작하더니
갑자기 서로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퍼지면서 모든 것이 하얗게 터져버렸습니다.
하얀 빛 사이로 우리가 배를 타고 있으며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누군가 뒤쪽에서 소리를 지릅니다.
“자, 조금만 힘을 내요. 저 앞에 소용돌이가 보입니다. 저 곳으로 빠져나갈 수 있으니 힘껏 노를 저으라구요.”
모두들 이를 악물고 노를 저었습니다.
이제 빛은 머리 위로 올라가 우리가 타고 있는 배와 물살을 가르는 노들, 파란 물결이 치는 강이 보였습니다.
“저기!”
모두들 앞을 보니 커다란 둥근 구멍이 있었습니다.
그 구멍으로 물살이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폭포였습니다. 거센 물살에 휩싸여 우리도 둥근 폭포 안으로 떨어졌습니다.
몇 분간 떨어지자 폭포가 끝나는 지점에서 물살은 다시 바닥면을 타고 흘렀습니다.
이해하기 어렵다면 그림을 함께 봐주십시오.
우리는 빛을 통과한 후 1지점에서 의식이 깨었고, 2지점까지 열심히 노를 저어서 폭포처럼 떨어져 3지점까지 떨어졌죠.
그런데 여기서 물살은 다시 3에서 4까지의 면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3과 5사이에는 빈 허공이 있었고, 3에서 4까지의 물살은 5로 떨어지지 않고 5의 수면과 마주보며 나란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몸 속까지 차가워지는 둥근 폭포 속의 공기를 뚫고 3의 지점에서 우리는 거꾸로 매달린 채 4로 흐르는 수면 위 공간 너머로 또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3지점에서 4지점까지 거꾸로 얼마간을 더 물살을 따라 가다가 5의 물 속으로 순식간에 떨어졌습니다.
나는 물 속 깊이 가라앉았습니다. 꿈처럼 천천히 바람처럼 부드럽게 가라앉았죠. 바닥에는 집들이 잠겨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살던 마을이었던 것 같은데 물에 잠겼나 봅니다.
집들은 평화롭게 잠들어있고, 마당은 누군가 깨끗하게 쓸어놓은 그대로 입니다.
나는 바닥까지 가라앉은 후 집 사이를 다녀보았습니다.
어릴 적 우리 동네의 골목과 똑같이 생긴 익숙한 골목입니다.
내가 멈춰 선 길 옆에는 장독대와 도시 가스 통 따위를 내어놓는 공간이 있고, 부엌 창문이 마주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 가끔 문이 잠겨있고 열쇠가 없을 때면 몸집 작고 유연한 내가 부엌창문으로 들어갔습니다.
한 번은 저녁 외식을 하고돌아왔는데 열쇠를 깜빡한 엄마의 실수로 집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모두들 나를 부엌 창문 쪽으로 몰았지요.
내가 요가를 하듯 팔 어깨 머리 몸통 다리를 창문으로 집어넣는 동안 마당에서 식구들은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부엌 바닥에 쿵 하고 뛰어 내려 캄캄한 집 안을 가로질러 현관 문을 열었을 때,
저녁 어스름을 등지고 내가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던 검은 그림자의 식구들이 문 밖에 서 있었습니다.
내가 문을 열자 다시 환해진 표정으로 하나 둘 신발을 털고 집 안으로 들어왔지요.
그런 부엌 창문을 지금 다시 보니 여기로 들어가다니 그 때의 나는 얼마나 작았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때에 찌든 방충망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부엌에서 누군가 움직이는군요.
그러고 보니 무언가 맛있는 냄새가 흘러나옵니다. 누군가 싱크대 쪽에서 돌아서며 창 가까이 찬장으로 옵니다.
엄마입니다. 내가 어릴 때 아직 젊었던 모습의 엄마 말입니다.
엄마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불을 잘 안 켭니다.
부엌에서나 화장실에서나 익숙한 행동을 할 때면 전기 값을 아껴보려는 것인지 귀찮은 것인지 불도 켜지 않은 채 할 일을 합니다.
지금도 지고 있는 해의 마지막 빛을 받으며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군요.
엄마가 식탁에 음식들을 놓으며 드디어 불을 켭니다.
“밥 먹으러 와라!”
하고 안쪽을 향해서 큰 소리로 말합니다.
“자, 밥 먹자”
거실 쪽에서 TV를 켠 채 신문을 보고 있던 아빠가 신문을 반으로 착- 접으며 일어나는 소리가 들립니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나더니 오빠와 내가 나옵니다. 나는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학교 가는 버스가 오기 전에 졸린 눈으로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고 있으면 엄마가 뒤에서 빗질을 해서 묶어주던 머리입니다.
모두들 제 자리에 앉자 엄마가 부엌에서 그릇하나를 들고 가 식탁에 올려놓습니다.
“와, 계란찜이다”
하는 소리에 나는 그 그릇을 자세히 봅니다. 다시 보고 싶었던 그 그릇이군요.
나는 안으로 들어가 그 그릇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없을까 주위를 둘러봤습니다.
나는 집 주위를 한 바퀴 돌며 열려진 창문이 없나 살폈습니다.
집 뒤에 화장실의 작은 창문이 열려있는 것을 발견하고 잽싸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환하고 조용한 내가 좋아하는 안방 화장실입니다.
안방 화장실은 안에 있으면 차분하게 마음이 가라앉고 생각도 잘 떠올라 내가 혼자 공상하기 좋아했던 곳이지요.
이렇게 위에서 부드럽게 떨어지는 햇살로 보아 아침 시간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돌아보니 변기 위에 어린 내가 앉아 있군요.
나는 또 혼자 생각에 빠져있는 표정입니다.
좁고 빛으로 가득한 이 공간에 어린 내가 마음 속으로 떠올리는 생각들이 울려 퍼집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똥을 누고 있는 게 혹시 꿈이면 어떡하지?
나는 혼자 화장실에서 편안하게 있는 데 이게 나 혼자의 착각이어서,
누군가 많은 사람들이 둘러앉아 지금 내가 이러고 있는 걸 보고 있는 거라면 어떡하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어떤 다른 세계가 있어서 그 세계에서 지금 내가 살아가는 걸 다 실험하고 있는 거면..
엄마도, 아빠도, 식구들도 다 짜여진 가짜이고 나 혼자 불쌍하게 이게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 거라면..
난 누굴 믿어야 하지? 이게 사실이라면 실험을 하는 이들이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내버려둘까?
혹시 고장이 난 것일까. 알면 안 되는 건데 고장이 나서 모두들 지금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몰라.
아니, 혹시 다른 곳에서 또 다른 내가 똑같이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차원이 다른 세계에서 다른 시간을 살고 있는 내가 또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 생각은 다른 차원에서 살고 있는 내가 나에게 보내는 신호일까?…’
어린 나는 다리가 저려올 때까지 이렇게 고민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이씨, 다리 저려.. 나가야겠다’
라며 휴지를 둘둘 뺍니다. 창 밖으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립니다.
쏟아지는 햇살이 눈이 부십니다.
어린 나는 어떤 새가 지저귀는 것인지 보려고 창문으로 다가가 뒤꿈치를 듭니다.
창문은 너무 높은 곳에 있습니다. 까치발을 한 채 고개를 빼어봐도 역부족입니다.
나는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을 쳐다봅니다.
햇살이 너무 밝아 눈이 부셔 미간을 찌푸립니다.
나는 그 빛을 향해 두 팔을 뻗어 봅니다.
나는 빛을 향해 올라갑니다.
환한 빛으로 올라 마을 위로 날아 파란 물을 통과하고 다시 세포를 뚫는 빛 안으로 들어갑니다.
누군가 내 두 팔을 잡았습니다.
“끌어올려!”
나의 팔을 잡은 이들이 내 몸을 힘차게 끌어올립니다.
나는 땅 위로 올라 바닥에 눕혀졌습니다.
내 위로 사람들의 얼굴이 보입니다. 구조원 모자를 쓴 아저씨 둘이 내 양 옆에서 내려다 보고있습니다.
“이제 살았습니다. 안심해요. 고생 많았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은 나요? 엘리베이터가 추락해서 갇혀있다 겨우 구조되셨어요.”
두 얼굴 옆으로 여자의 얼굴이 보이더니 내 팔을 잡고 무언가를 감습니다.
“충격으로 기절하셔서 기억 안 나실 수도 있어요. 거의 반나절 만에 구조되신 거에요.”
여자가 차분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얘기를 했습니다.
“어디 크게 다치신 데는 없구요. 다만.. 오른쪽 눈이…”
나는 손을 들어 오른쪽 눈 부위를 만져봤습니다. 오른쪽 눈이 없어졌군요.
“어떻게 빠지게 된 것인지는 현장을 자세히 조사해서 알아봐야 될 거에요.
워낙 엘리베이터가 크게 손상돼서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이렇게 살아 나오신 것만 해도 기적이에요.”
나는 들것에 실려 응급차로 향했습니다.
나는 나의 오른쪽 눈알이 다른 차원의 세계로 영영 들어가버린 것을 안다고 얘기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 초미니 문을 다시 찾아 나올 수 있겠습니까.
단지 하필 시력이 좋은 오른쪽 눈알이 없어졌다는 것이 많이 아쉬울 뿐입니다.
2001.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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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
호찬님 페이지를 통해 와보게 되었습니다.
상상력이 대단 하시군요 ^^
재밌게 봤습니다.
Posted by hyo | September 23, 2003 2:01 PM
이런 말 해준 건 hyo님이 처음인거 아세요?
다른 사람들은 '이게 뭐야. 뭐 어떻게 됐다고? 이해가 안가!' 블라블라..T.T
문장력의 한계로 설명을 제대로 못하다 보니 저런 조악한 그림까지. 하하핫!
...
어쨌든 재밌게 보셨다니 기쁘네요.
얘기에는 실화와 공상이 섞여있다구요.
Posted by lunatree | September 24, 2003 4:00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