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랜 만에 일찍, 7시 반쯤 퇴근을 했다.
저물녘이지만 이 정도면 밝고 좋아.. 거리를 지나 버스를 탔다.
뒤에서 두번째 자리에 앉아서 가는데 뒷 자리에 앉은 남자 둘이서 하는 얘기가 들렸다.
언뜻 'tommorow..' 어쩌구 하는 짧은 영어가 들렸는데, 한 남자는 미국 생활을 오래 했거나 교포인 듯 한 발음. 다른 남자는 평범한 한국 사람인 것 같았다.
둘은 영화를 찍는 일을 하나 보다.
내일 촬영은 어쩌고, 오늘은 캠을 드느라 어깨가 아팠다. 오프닝이랑 엔딩을 무지하게 길게 만들자. 100부터 카운팅하면 어때, 좋은 생각이지?.. 하는 얘기를 주고 받았다.
미국발음이 섞인 남자가 '근데 너 영화는 어떤 거야? 첫 장면 부터 끝에까지 얘기해봐'하자 한국토종발음이 얘기했다.
"엘리베이터 앞으로 어떤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가. 버튼을 막 눌러. 인터뷰가 있는데 늦은 거야. 그래서 막 정장 입었는데 넥타이 매면서 엘리베이터 기다려. 문이 열려서 탔는데 안에 여자가 있는거야.
근데 왜 같은 동네에 한 아파트 사는 사람이라도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어색하잖아. 뻘쭘하잖아. 원래 엘리베이터에서는 다들 그렇잖아.
그래서 내려가는 동안 서로 서서 있는데, 남자 시점에서 여자를 좀 흘끔흘끔 보는거야. 약간 관심은 가는데 뭐 그냥 내려가.
문이 열리면 이 남자는 다른 데로 막 가는데, 어떤 빌딩 화장실로 들어가. 오줌 싸러. 그런데 또 다른 남자가 하나 있었던 거야. 그래서 나란히 옆에 서는데 왜 그렇잖아. 오줌 싸러 서 있어도 다른 사람이랑 옆에 있으면 어색하잖아.
그리고 먼저 있던 남자가 오줌 다 싸고 나가면 이제 이 남자를 카메라가 따라가는 거야.
이 남자가 걸어서 지하철 타러 계단을 내려가. 이 남자가 내려가고 한 여자가 올라오는데 남자랑 둘이 부딪혀. 그래서 뭐가 떨어져. 지갑 같은거.. 그래서 딱 여자가 주우면 그때 부터는 이 여자의 시점이 되는건데, 이 여자가 아까 첫번째 남자가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여자인거야.
그러니까 처음에는 여자 얼굴을 보여주면 안되지. 그리고 지갑을 주운 후부터는 뒤로 가는 거야. 여자가 남자랑 부딪히기 전에 지하철을 타고, 거리를 걷고, 뭐 다른 가게에도 들렀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고, 엘리베이터에 한 남자가 타고 그렇게 뒤로 가는 거지.
그리고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여자도 남자한테 마음이 있어서 남자를 살짝 보는 걸로.. "
얘기를 다 들은 미국식 발음이 묻는다. 꼭 지오디의 박준형처럼..
"야 그러면 여자는 어떻게 뒤로 가게 할 거야?"
"어? 그냥 찍어서 필름을 리와인드 해야지."
"연기를 뒤로 가게 하는 건 아니고?"
"그것도 생각해 봤는데, 찍기 어려울 거 같아서"
"너 뒤로 걸어봤어? 그거 되게 이상하잖아. 못할 걸 아마."
"응. 그니까 정상으로 찍은 다음에 뒤로 돌려야지"
커피빈 앞 정류장에 왔을 때 남자 둘은 내렸다.
남자들이 내린 후에 생각이 났다.
예전에 그런 말 한 영화 감독인가.. TV에서인지 잡지 인터뷰에서 얘기한 건지.. 기억은 잘 안나는데,
자기가 고등학교 때 쯤 대한극장에서 어떤 영화를 보는데, 우연히 2층에서 음료수 캔이 떨어지는 걸 봤다고.
그런데 오랜 시간이 흘러 같은 쪽 일을 하는 사람을 만나 얘기를 하다보니, 그 때 그 음료수 캔이 떨어지는 걸 그 사람도 봤더라고. 음료수 캔이 2층에서 1층으로 낙하하는 순간 둘은 같은 공간에 있었던 것이다.
음..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이 장만옥에게 몇날 몇일 자기와 함께 한 1분을 기억시키는 것과는 반대라고 볼 수 있겠지.
나중에 그 한국식발음이 영화를 만들게 되서 내가 그 영화를 보거나,
아니면 그 영화를 만들지 못하더라도.. 언젠가 그런 단편 영화를 만들어 보려고 버스에서 친구에게 말을 한 적이 있었고, 그 얘기를 하는 순간 앞 자리에서 듣고 있던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을 상기시킬 수 있는 날이 올까?
우리는 어쩌면 만약에.. 그 노래 제목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