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봄날 저녁의 쌀쌀한 기운에 잔뜩 움츠리고 종종 걸음으로 아파트 뒷길을 다 걸어왔을 때쯤.
보도 위에 하얀 토끼 한 마리. 멈칫.
영숙이??
그 토끼는 내가 전에 키우던 영숙씨라는 토끼를 꼭 닮았다.
(내가 미국에 3주간 여행을 간 사이.. 알레르기에 시달리던 엄마가 아파트 앞 학교 정문에 토요일마다 나오던 토끼장수에게 줘버렸다. )
순간 내가 지켜주지 못한 토끼가 새 주인에게 버림을 받고 다시 내 눈 앞에 나타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울컥 했다.
하지만.. 영숙씨보다는 몸집이 작은 놈이었다.
하얀 등에 점점이 있는 얼룩은 정말 똑같은데...
영숙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영숙씨를 닮은 다른 토끼일 것이라는 확신 사이에서
나는 토끼를 불러봤다.
쪼쪼쪼쪼.. 영숙아~
토끼는 옆눈질로 부지런히 나를 경계하며 이리 저리 피해 폴짝 거렸다.
토끼를 내쫒으려는 엄마의 성화가 거세어 질 쯤에 영숙씨(수컷)에게는 점점 암컷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안타깝지만 일이 어떻게 풀릴지 몰라서 중성화 수술도, 암컷도 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엄마가 갖다 버릴까봐 이것저것 우리며 밥그릇이며 돈을 들여 샀다. 사료도 푸짐하게 쟁여놓고..
봐라, 돈 이만큼 들였으니 갖다버리면 손해다. 하며 큰소리도 쳐봤지.
엄마가 토끼장수와의 접선을 시도했을 때..
토끼 장수는 안그래도 새끼 뺄 숫놈이 필요했다면서 영숙씨가 예쁘게 생겼다고 좋아했단다.
어쩌면.. 암컷을 만나 욕구를 해소할 수 있어서 영숙씨에게 잘 된 일일지도 몰라..
어두운 밤. 컴컴한 아파트 뒷 길에 .. 내 눈을 확 밝히며 조용히 나타난 흰 토끼 한마리.
그 놈. 어쩌면 그렇게 토끼 장수에게로 간 영숙씨의 새끼, 또는 손주뻘일지도 몰라.
주위에 주인처럼 보이는 사람도 없고, 녀석도 당황한 것 같은데
이대로 뒀다가는 사나운 떠돌이 고양이를 만나 해를 당할 수도 있고, 교통사고를 당할 수도 있을텐데,
먹을 것이나 찾아서 먹을 수 있으려나 걱정이 되었지만 녀석은 여전히 요리조리 나를 피해 폴짝 거린다..
이 놈을 구해서 집에 데려가는 것이 옳을 것인지 고민을 하다 결국 추위 속에 나는 포기를 한다.
그 토끼...
정말 영숙씨였는지, 영숙씨의 새끼였는지, 영숙씨를 닮은 다른 토끼인지, 아니면 영숙씨의 환영인지...
그렇게 거리의 동물이 되어버릴 운명이었다면 어디 깊은 산 속에서 태어나지 그랬니.
제발 어느날 아침 출근 길에 다리를 하늘로 향한 처참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는 일은 없기를 빌고 또 빌어본다.
미안하다 영숙아. 그 보드라운 털. 손가락을 핥던 가느다란 분홍 혓바닥, 털손질을 하다 문득 쳐다보던 까만 눈.
그렇게 보낸 모든 동물들에게 미안하다.
Comments (3)
저희 사무실에도 이전에 토끼가 몇 마리 있었는데..
건강하고 자라지 못해서 ㅠ.ㅠ
Posted by 이장 | May 23, 2003 1:47 PM
와. 사무실에서 토끼를 키웠다니.. 자유분방한 분위기인가 보죠. 디자인 회사나 프리랜서들이 모여있는 사무실에서는 고양이 키우는 건 많이 봤는데... ^^
Posted by lunatree | May 23, 2003 3:46 PM
아주 열려 있는 회사랍니다.
디자인 회사는 아니구요 wsp (webhosting service provider)라고 웹호스팅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랍니다.
Posted by 이장 | May 23, 2003 4:52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