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8

2002/10/26 03:09 from 분류없음

10월 26일
맨하탄으로 나가는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너무 졸려서 창가에 앉아서 정신없이 잤다.
중간에 라틴계 남자가 옆에 앉는 것을 어렴풋이 보고 계속 자는데,
깰 때마다 이 남자가 옆에서 쳐다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만약 무슨 일이 있을 때 해줄 욕들을 생각해두고 다시 잠들었던 거 같다.
맨하탄에 다 도착해서, 벗어뒀던 자켓을 입으려고 주섬주섬 하면서
잠결에 자켓에 팔을 못 넣고 버둥대니까 그 남자가 옆에서 보고있다가 자켓을 입혀줬다.
학.. 순간 얼마나 당황했던지 잠이 홀딱 깨면서.. 고맙다고 했다.
남자는 자켓을 입혀준 후로도 계속 얘기를 하고 싶어하는 눈치였고,
뒤에서부터 내리려고 나오는 버스 승객들의 줄을 중간에 끊어서 내가 나갈 수 있게 해줬다.
고맙긴 하지만 왠지 부담스럽고 이상한 인간이면 어쩌지 싶은 생각에
애써 눈을 안 마주치려고 하면서 빠른 걸음으로 터미널로 들어갔다.
남자가 인사라도 하려는 듯이 쫒아오는데 열라 빠른 걸음으로 약속장소인 편의점으로 가서
태연이를 만났다. 왠지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태연이와 5번가 백화점에 가서 키엘 스킨과 MAC 립라커를 사고,
화장품 사러 온 멋진 오빠커플들을 구경하고, 옷 구경을 했는데 너무 비쌌다.
삭스피프스, 바니스 뉴욕 백화점을 보고 몇몇 브랜드 매장을 들어가 봤지만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서 사지는 못했다.
'사이공 그릴'에 가서 탕수 생선 튀김과 쌀국수를 먹었는데 싸고 굉장히 맛있었다.
사이공 그릴은 베트남 음식점이지만 중국인이 주인이란다.

태연이 일하는 바에 들렀더니 수진언니가 'H&M'에 물건이 많이 들어온 날이라
건질 것이 많을 거라며 가보라고 한다. 하루종일 돌아다녀도 예쁘다 싶으면 너무 비싼 가격 때문에
사려던 옷들을 사지 못했던 우리는 와~~ 하고 당장 달려 나갔다.
9시에 문을 닫는데 나온 시각이 8시여서 쇼핑할 시간은 1시간 밖에 없었다.
그때 그때 유행에 맞는 저가의 옷을 살 수 있는 'H&M'은
왕창 사서 싸게싸게 입고 새로운 것을 사는 스타일의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
신나게 쇼핑을 하고 이따만한 쇼핑백을 들고 나오니 왠지 후련했다.
신난 우리는 내가 이럴려고 돈 벌었지 하고 둘이 낄낄거렸다.
바람이 쌩쌩 불어 추운 밤이었는데 길거리를 뛰어다니며 담배를 피는 것도
여기서만 할 수 있는 거니까 하고 담배불을 붙이며 태연이랑 웃었다.

집에 와서 엄마한테 전화를 했는데, 내 토끼 잘 있냐고 물으니 잘 있다고 대답하는 소리가 이상해서
오빠한테 다시 물어보니 엄마가 토요일마다 집 앞에 오는 토끼 장수한테 줬다고 한다.
그 아저씨가 안그래도 새끼 뺄 수놈이 필요했는데 참 예쁘다고 하면서 가져갔단다.
그동안 중성화 수술을 해줘야 하는 걸 토끼값이 1만원인데 수술비가 8만원이어서 망설이며 못해줬는데,
짜식.. 결국 그 토끼장수네 종토로 가는 구나. 씨.. 너무 엄마가 미워서 전화를 끊었다.
내가 여행만 오면 이때다 하며 꼭 키우던 동물을 누구 줘버린다.
집에 가도 그리운 그 놈이 없을거라는 생각을 하니 너무 마음이 허전해서 눈물이 나왔다.
침대에 누워서 영숙씨~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Posted by lunatree 트랙백 0 : 댓글 0